'책리뷰'에 해당되는 글 9건
- 2008/04/28 밖에서 본 한국史 VS 한단고기
- 2008/04/13 서평이란 (1)
- 2008/04/10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 - 조지프 E. 스티글리츠, 앤드루 찰턴 (3)
- 2008/04/01 승자독식사회 (3)
- 2008/03/28 세계화와 그 불만 - 스티글리츠 지음, 송철복 옮김 (2)
- 2008/03/24 88만원세대 - 우석훈, 박권일 (5)
- 2008/03/01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5)
- 2008/02/19 헬스의 거짓말-지나 콜라타 (1)
- 2007/10/27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1)
밖에서 본 한국史 VS 한단고기
' 민족주의의 지나친 발현이 아닐까?' - 한단고기
극단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두 책이다. 먼저 접했던 책은 『한단고기』. 군대에 있던 시절, 가끔 부대에서 외부강사를 초청해 여러가지 강의(?)를 듣곤 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이 책의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모임의 회원이었다. 당시에 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긴했는데, 호기심에서 전역후에 사서 읽어봤었다.
핵심적인 주장은 우리민족이 세웠던 국가의 역사가 1만년은 되었고, 그 활동범위도 만주정도가 아니라 몽골지역에 이를 정도였다는 것이다.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이토록 찬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지금은 손바닥만한 반도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상황에 못마땅해하는 인식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다.
북쪽에 앞선 기술을 가진 민족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기술을 전파하고 국가를 건설하면서 지배층을 이루었다 정도가 좀더 일반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신화를 보면 이런 과정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는? 뜬금없이 알에서 사람이 나와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알이 외부인을 상징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후의 신라발전과정을 보자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 현격히 느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지역에 살고있던 독자적인 세력이라고 보는게 합당하지 않을까?
'내가 원하던 시각에서 국사를 서술해준 책' - 밖에서 본 한국사
『밖에서 본 한국史』는 흔히 삼국통일이라고 부르는 과정에 대해서 신라의 팽창이라는 색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나는 이게 좀더 현실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영토나 유민 어느 쪽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이것을 두고 3국 통일이라고 부르면서 뒤이어 일어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마저 우리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같은 민족이라면서 의사소통도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국사라는 틀은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기에는 시야를 제한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현대사에는 일본, 미국, 러시아 같은 외부 세력을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인지 세계화라는 넓은 시각에서의 해석이 강조된다. 그런데 고대나 중세 시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지나치게 우리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듯하다. 이 책은 그런 한계를 벗어나서 외부의 상황과 우리 역사를 연계해 서술하고 있다.
이책은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일일이 사료의 출처를 밝혀가며 엄격하게 쓰여진 책은 아니다. 어떤 면으로는 저자의 상상이나 추측에 너무 의존해서 쓴게 아닌가하는 부분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우리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주는 이 책의 가치를 가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책 블로그(블로그코리아 책 분야랭킹 7위다 무려)를 운영하면서 가장 많이 다루어야 할 것은 책에 관한 글, 서평이다. 책에 관한 글을 쓰지 그럼 사진을 찍느냐..라고 농담삼아 반문해보기도 하지만,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정작 서평에 관한 스스로 주관을 세우지 못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다음 글을 옮기며
다음에는 서평에 관한 주제로 직접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는, 이 글을 포스팅했다는 것은 아마 쓰지 않게 될 것이란 뜻이다.
교수신문(08. 01. 29) '소개’와 ‘비평’ 사이에 놓인 판관의 칼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책이 있는 곳에 서평이 따라붙는 것은 자연스럽다. 서평은 말 그대로 책의 됨됨이에 대한 평이니까 책이란 물건이 존재하는 이상 서평은 불가피하다. 책에 대한 평이라고 했지만 이때 評은 좋고 나쁨 따위를 평가하는 말이다.그럼으로써 값을 매기는 일이다. 책도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니까 풀어서 말하자면 한 책에 대해 품평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원적 의미 그대로 ‘꼴값’을 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판별을 위해서 보통은 책을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읽어야 한다. 적어도 넘겨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리뷰(re-view)다.
이 ‘리뷰’란 말 자체에 ‘비평’이란 뜻도 포함돼 있지만 나는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는 책에 대한 ‘소개’와 ‘비평’ 사이가 아닌가 싶다. ‘소개’의 대표적인 유형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보도자료’와 언론의 ‘신간소개’일 것이다. 그것은 주로 어떤 책의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어, 이런 책이 나왔네!”란 반응을 유도한다. 반면에 ‘서평’은 그것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인가를 식별해줌으로써 아직 책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길잡이다. “이건 읽어봐야겠군.”이라거나 “이건 안 읽어도 되겠어.”가 서평이 염두에 두는 반응이다. 그에 대해 ‘비평’은 책을 이미 읽은 독자들을 향하여 한 번 더 읽으라고 독려한다. 그것은 독자가 놓치거나 넘겨짚은 대목들을 짚어줌으로써 “내가 이 책 읽은 거 맞아?”라는 자성을 촉구한다.
물론 소개-서평-비평은 일종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이어서 경계를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책에 관한 담화와 담론들은 이 세 요소들을 약간씩이라도 모두 포함하기 마련이다. 다만 분류는 그 비율과 방점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가 그렇게 가늠될 수 있다면 서평의 바람직한 역할이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적어도 일반론적인 차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보다 세분해서 서평의 유형학을 가정할 경우에는 초점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서평의 유형은 다양한 기준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먼저 그 서평의 주체에 따라서 일반독자, 전문독자, 전문가 서평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독자란 자신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책을 사서 읽게 되는 보통의 독자를 가리키며, 전문독자는 주로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란 직함을 달고 여러 매체에 정기적으로 북리뷰나 칼럼을 게재하는 이들이나 언론의 출판면 담당기자들이 지목될 수 있다. 그리고 전문가란 서평을 정기적으로 담당하지는 않지만 해당 분야의 전공자로서 식견과 조예를 갖고 있는 이들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독자 유형 또한 중복 가능하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인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서평의 주체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다면 바람직한 것은 이들이 유기적인 분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이겠다.
두 번째로, 서평의 또 다른 분류기준은 분량이다. 원고지 매수로 따지자면 5매, 10매, 20매, 30매 등의 유형학이 가능하다. 분량의 제한이 없는 자유서평이 아닌 이상 대개의 ‘공식적인’ 서평들은 분량의 제한을 요구받으며 이러한 분량 자체가 서평의 내용을 상당 부분 한정한다.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평하느냐는 전적으로 이 분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서평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평만큼은 아니더라도 보다 많은 분량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 주요한 학술서나 교양서를 평하면서 원고지 10매 분량도 할애하지 않는 것은 ‘서평 문화’ 자체의 피상성을 양산할 따름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서평을 다루는 매체 또한 서평의 분류기준이다. 이것은 서평의 주체와도 얼추 상응하는데, 주로 일반독자들의 서평이 올라오는 온라인서점이나 개인 블로그, 그리고 전문독자들의 리뷰들이 게재되는 일간지, 주간지 등의 언론매체, 끝으로 전공자들의 학술서평이 실리는 학술지 등이 서평의 유형학을 구성한다. 여기서도 물론 바람직한 것은 각 매체별 서평들의 역할 분담이고 특화이다. 매체에 따라서 요구되는 서평의 성격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그 성격과 내용에 따른 분류이다. 서평은 대상도서의 학술적, 사회적 의의를 거론할 수도 있고, 도서 상태의 문제점과 오류들에 대한 지적으로 채워질 수도 있다. 그것은 곧 책에 대한 권유/만류와도 맞물리는데, ‘반드시 읽어보시길’ 권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낭비하지 마시길’이라고 충고를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 두 가지 양 극단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독자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서평이란 그러한 권유/충고가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나열한 대로 우리의 ‘서평 문화’는 다양한 층위의 서평들로 구성되며 따라서 일률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론 서평의 경우에 신간들 위주의 표면적인 소개보다는 일정 분량 이상이 전제된 깊이 있는 리뷰들이 보다 많이 다뤄지기를 기대해볼 수는 있겠다. 이런 정도의 소감밖에 피력할 수 없는 것은 ‘주요 서평자’로 거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로 해온 일이 본격적인 서평이라기보다는 주변적인 서평 혹은 책에 대한 수다 정도이기 때문이다.
(중략)
물론 지면의 성격과 분량의 제약이 서평의 일차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만한 책을 판별해내고 엉터리 책들을 감시하는 서평의 고유한 자기 역할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서평을 통한 학문적 교류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ps. 학문적 교류까지는 내 알바 아니고.. 서평의 역할에 신경쓸 정도도 아닌 것 같다. 난 그저 읽고 쓸 뿐이다.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 - 조지프 E. 스티글리츠, 앤드루 찰턴
두 번째로 읽게된 스티글리츠의 책이다. 2002년작인 세계화와 그 불만이 주로 금융부문에 초점을 맞췄다면 2005년에 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GATT와 WTO로 이어지는 선진국들의 무역체제 장악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장하준의 책들과 거의 비슷한 관점이지만, 장하준은 과거 선진국들의 전략과 가상적인 예를 들어서 쉽게 읽혔다면 이 책은 현실의 예를 들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딱딱하게 느껴진다.
자유무역을 하자는 선진국들의 주장 뒤에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라는 강력한 이론적 배경이 있다.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이론이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자신들의 비교열위 분야-특히 농업-에 대해서는 막대한 보조금을 대면서 보호주의를 고수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다른 책에서도 많이 지적된 부분이다. 이 책에서는 그 외에 유럽연합의 '무기를 제외한 모든 것'1같은 제안의 허구성 등을 밝히고 조정비용같은 개념을 통해 자유무역이 개발도상국 주민들의 삶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무역협정이란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자유무역하에서는 양 쪽이 조금씩 이득을 보고, 양 쪽이 모두 보호무역을 한다면 둘 다 손해를 본다. 어느 한 쪽은 개방하고 나머지는 보호한다면 개방한 쪽이 큰 손해를 보고 보호를 한 쪽은 큰 이득을 본다. 엉성하지만 표로 만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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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
보호 | 자유 |
| 보호 | 손해, 손해 | 큰 이득, 손해 |
| 자유 | 손해, 큰 이득 | 이득, 이득 |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푸른 색에 가까워 보인다. 노란 부분은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선택할 수도 없다. 결국 개발도상국들의 발전 가능성은 선진국들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론이다. 현재의 체제하에서 가장 큰 이득을 누리고 있는 집단이 자신들의 이득을 조금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면 현실은 바뀌기 어려워보인다.
- 최빈국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 무기를 제외한 모든 수출품에 대해 쿼터와 관세를 철폐하기로한 제안 [본문으로]

원저 The winner-take-all society 는 1995년에 나온 책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예로 든 것들이 현시성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수준이다. 스포츠 스타들로 패트릭 유잉, 앙드레 아가시 같은 선수들이 나오는 정도고 Microsoft와 인텔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장독식을 말하면서 MS-DOS를 예로 들고 있는 부분에선 심히 한숨이 나왔다. 그럼에도, 2008년의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그 승자독식사회화가 더욱 급격히 진행되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사실이다. 이 책을 13년이나 지난 이제서 번역한 역자나 펴낸 출판사에서도 염두에 둔 부분일 것이다.
승자독식시장은 소수, 1%의 승자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시장을 말한다. 최고의 가수들 몇몇만 있어도 그들의 음원을 하나 더 생산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 비해 근소한 차이로 열세를 보이는 가수들에게 투자할 투자자는 없어진다. 때문에 승자들은 천문학적인 액수를 챙기고, 패자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명해야 하는 것이다.
불행한 것은 승자가 얻어가는 것이 많아질수록, 다수의 패자들은 그 꿈을 더욱 키워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수천만 달러를 버는 메이저리거들을 보며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얼마나 그 꿈에 근접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파악할 수 없다. 패배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사는 것은 젊은이가 가지기에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이너리거가 되고 몇년이 지나서야, 천만불을 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많지 않다.
물론 패자들이 갖는 것은 적은 돈일지라도, 그들은 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많은 수의 그들은 '좋아하는 야구를 하면서 어렵게 살기'와 '조금 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더 잘 살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선택할 기회를 어린 시절에 박탈당한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사회에서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어쩌면 무수한 스포트라이트들이 강요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한 야구를 하는 탓에 사회가 잃어버리는 기회비용은 매우 크다. 천명이 육상선수를 하나, 열명이 육상선수를 하나 100m 금메달리스트는 한명 뿐이다. 그리고 990명이 다른 일을 할 때 그들과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는 아니다.
경쟁이 더 나은 상품을 만드는 것은 진리에 가까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경쟁이 상품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에서 한계에 맞는다. 그러나 경쟁이 과열될수록 승자가 가지는 메리트는 커지고 더 많은 사람은 패자가 되고 만다. 개인이 승자독식시장에 뛰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빠져든 개인을 구할 수 있는 수단도 이 사회는 가지고 있지 않다.
저자가 많이 드는 예가 스포츠산업이지만, 스포츠 외에도 승자독식시장은 곳곳에 있다. 언젠가 베스트셀러가 될지도 모르는 책을 쓰는 작가들, <뉴욕 타임즈>에 매주 실리는 15편의 서평에 속하지 않는다면 베스트셀러가 되기는 힘들다. 그들에게 작품 외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 시장이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학벌시장. 수능점수 몇점 차이로 대한민국 1%계층이 결정된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승자독식시장은 만성적이다. 저자가 설명하는 미국의 아이비리그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수한 학생을 선발한 대학은 더 우수한 교수진을 모으고, 우수한 교수진은 더 우수한 학생들을 부른다. 내 이야기만 하더라도, 내가 부산대학교에 갔더라면, 전액장학금을 4년 내내 받았겠지만 나와 우리 부모님은 사립대학교 등록금에다가 서울 유학이라는 추가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사회가 승자독식사회임을 염두에 두지 않은 '합리적 경제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내 선택이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비웃을 사람은 이 사회에 많지 않다.
읽는 내내 나를 우울하게 만들던 저자는 책 말미에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준다. 승자독식시장의 승자도 결국엔 그리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인데, 이런 걸 위로랍시고 하는 저자가 우습기도 했지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것이 그와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는 생각에 먹먹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세계화와 그 불만 - 스티글리츠 지음, 송철복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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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글리츠는 내가 신입생 시절에 경제학 수업의 교재로 샀던 책의 저자이다. 교수님(인지 강사인지 알 수도 없던 시절)이 교재로 맨큐와 스티글리츠를 소개했는데 대부분 맨큐의 책만 사거나, 얻어서 보거나 하던 때에 뭣 모르고 혼자 그 비싼책을 2권 모두 덜컥 사버렸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잊을 수 없다. 이 책은 2002년에 씌여졌고 우리나라에도 바로 그 해 번역본이 나왔다. 아마도 스티글리츠가 2001년 노벨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대우(?)을 받은 것이 아닌가한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저자가 미국 정부와 세계은행에서 일하면서 경험한 선진국들의 일방적인 세계화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아프리카 저개발국, 90년대 말 동아시아, 동구권이 시장주의로 변환기,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지속적인 경제 발전 실패 등의 원인을 IMF의 활동에 초점을 맞춰서 분석하고 있다. 약 300 페이지 이상 이런 사례들을 읽다보면 IMF의 정책이 누구를 위한 정책이었는지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 뒷부분에 이르면 저자는 직접적으로 IMF가 선진국 금융세력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IMF가 위기를 겪는 국가들을 상대로 금융시장 자율화 등을 조건으로 자금을 빌려주면, 하마터면 빚을 떼일뻔한 선진국의 투자자들이 재빨리 자신들의 자금을 회수하고, 결국 해당국은 자신들의 자산-예를 들면 국영기업의 민영화-을 팔아서 빚을 갚을 수 밖에 없던 사례들을 반복해서 보여주면서 일그러진 세계화를 비판하고 있다.
장하준의 책들이 선진국 정부들의 전략 - 자국의 산업은 보호하고 외국의 무역장벽만 해체시키려는 시도 - 에 비난의 초점을 두고 있다면, 스티글리츠는 국제기구를 통한 금융세력들의 약탈에 가까운 행위를 비난하고 있다. 일단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곳에 투자를 하고 위기가 찾아오면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먹힐리가 없는 정책들을 후진국들에게 강요하면서 위험을 회피하는 방법은 그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기득권 세력들이 세계화라는 명분으로, 경제학 이론을 가장한 음모를 통해서 더 큰 이득을 추구하는 과정을 잘 묘사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다음에 읽을 책은 역시 스티글리츠의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이다. 2005년작으로 우리나라에는 작년에 번역본이 나왔다. 번역이라니까 생각났는데 책의 점수를 별 4개로 정한 것은 번역의 영향이 컸다. 원문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원래 어떤 문장이었는지 알 것 같은 번역에다 결정적으로 노벨상 수상자인 로널드 코즈의 이름을 코아제라고 적는 실수까지 보였다. 혹시 "Coase"를 코아제라고 할 수도 있는지 모르지만 여태까지 내가 봤던 모든 글에서는 코즈나 코스 정도였는데... 역자는 폴 크루그먼의 『대폭로』도 번역했는데 이것도 별로 였던거 같은 기억이... 불현듯 불안감이 들어서 확인해보니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도 같은 번역자다.
88만원세대 - 우석훈, 박권일
88만원 세대![]() 별점 2개. 넌 뭔데 프랑스 파리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 쓴 글을 혹평하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봤을땐 딱 저 정도다. 속빈 강정이라고나 할까 제목은 그럴 듯 했으나 내용이 부실했다.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니라 정치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선 서문에서 밝힌 88만원세대라는 이름을 붙인 과정부터 억지스럽다. 전체 비정규직의 평균임금 119만원에 전체임금과 20대의 임금 비율인 74%를 곱한게 88만원이란다. 비정규직도 나이에 따라서 임금이 올라가던가? 세대를 어떤 기준으로 나누느냐도 모호한데, 거기다 모든 세대는 이름이 있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드러내면서 억지로 붙여놓으니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 뒤로도 논리나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고 단순히 자신의 경험에서 얻어진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늘어놓고, '우리사회가 이렇다'라는걸 독자들이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식이다. 거기에 자신의 박식함을 자랑하려는 듯 여러 문학 작품을 군데군데 인용하고, 유럽파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는지 유럽 각국의 사회 제도와 그 형성과정에 대한 역사까지 아주 소상히 알려주시는데, 책 전반에 걸친 지나친 일반화와 뭉뚱그리기로 인해서 사실관계와 관계없이 신뢰성이 많이 떨어져버렸다. 가끔씩 해결책이라고 내놓는 방법들도 황당하다. 각 장별로 이 부분에 몇 만명, 저기 몇 십만명 정도 20대를 고용하면 해결된단다. 물론 그 제안들 중 한 두개 정도는 어떻게든 실행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책 전체에 나와있는 걸 다 실행할 수 있을까? 현직 공무원도 감축한다는 시기에?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신문이었던가 주간지였던가에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 소개를 봤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싫어서,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남들이 말하는 것이 싫은 것도 내가 책을 읽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다.
물론 상대방이 그 책을 읽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경우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느 구석에서는 껄끄러운 마음이 남아있는 것을 경험한다.
영화, TV드라마에 대해선 "나 그거 안봤는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심지어 태극기 휘날리며, D-워, 실미도, 살인의 추억 같은 '국민영화'들에 대해서도!!)
모르는 책, 제목만 들어본 책 이야기가 나올땐 한없이 작아지는 이유는 뭘까.
이 책도 뭐, 예고편이 다인 한국영화처럼 서평이 다인 책이겠지만
제목을 보고 끌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합뉴스(08. 02. 21)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영문학과 교수가 '햄릿'의 텍스트를 읽어본 적이 없으며 로렌스 올리비에의 영화 '햄릿'만 봤다고 털어놓는다면?. 그가 정말로 햄릿을 안 읽었다고 믿는 사람보다는 그가 굳이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책 읽는 문화가 시들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교양인'의 필수덕목으로 불리는 현실에서 책읽기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대화에서 언급되는 책들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거나, 얘기만 들었거나, 대충 읽었거나, 읽었는데도 내용을 거의 잊어버린 경우의 '죄책감'과 '수치심'은 누구나 경험한다. 그래서 "당신 이 책 읽었어요?"라고 묻는 것은 지식인 사회에서 일종의 금기다.

파리 8대학 프랑스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펴냄)에서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만이 자기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책을 읽지 말라고 조언하는 책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저자는 안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들려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책 읽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찾아갈 수 있는 책을 골라 읽는 기쁨을 이야기한다.
로베르트 무질이 쓴 소설 '특성없는 남자'에 나오는 도서관 사서 이야기는 비독서인에게는 위안이 된다. 350만권이 쌓인 도서관의 사서는 "카탈로그만 본다"며 "책의 내용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도서관에서 일하긴 글러먹은 사람이오! 그는 절대로 총체적 시각을 가질 수 없단 말입니다"라고 강변한다.
폴 발레리가 책 안 읽기의 대가였다는 것도 재미있다. 그는 책에 파묻혀 산 아나톨 프랑스를 '책벌레'라고 놀렸고, 마르셀 프루스트가 죽자 "설령 내가 그의 방대한 저작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드나 도데처럼 서로 전혀 다른 정신의 소유자들이 그의 중요성에 관해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의혹을 떨쳐버리기에는 충분하다"고 뻔뻔스럽게 평론을 썼다.
저자는 움베르토 에코가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연쇄살인의 도구로 설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등 실제로 읽은 사람은 별로 없지만 엄청나게 인용되고 있는 고전에 대해서는 "꼭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일찌감치 버리라"고 조언한다. 저자는 펼쳐보지도 않은 책에 대해 강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고백하면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에서 해방돼 '책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조채희 기자)
헬스의 거짓말-지나 콜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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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의 거짓말 - ![]() 지나 콜라타 지음, 김은영 옮김/사이언스북스 |
저자는 의료 · 과학기자로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기자라는 직업을 이용해서 미국에서 유행하는 각종 운동법이나 속설 등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 트레이너들과 만나면서 그 중에 어떤 것이 과학이고, 어떤 것이 마케팅인지에 관해서 알려주고 있다. 사실은 읽어보다가 느낀건데 이번에도 부제나, 소제목에 약간 속았다는 느낌이다. 서점에서 몇 페이지 읽어보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개인적인 경험 이야기-특히 우리나라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스피닝(고정 자전거 타기) 이야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가 많았고, 19세기나 20세기의 사람들이 운동에 대해 가졌던 인식, 미국의 피트니스 산업사, 운동선수들의 전설적 훈련법 같은 이야기는 약간 흥미있긴 했지만 내가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알게된 정보도 많았다. 그 중에 일부는 내가 다른 매체, 머슬&피트니스 같은 잡지를 통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식처럼 여겼던 부분도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제4장 피트니스 산업이 조작해 낸 유행 "체중 감량을 위해서는 저강도 운동으로 지방을 연소시켜야 한다." -는 주장의 명백한 오류들에서 나온 최대 심박수 차트에 대해서 알려준다. 이 공식(최대심박수=220-나이)은 심장병 환자를 대상으로 실험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결과가 뜻하지 않게 마케팅에 이용되면서 굳어진 경우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별로 정확하지도 않고, 알맞은 운동량을 정해주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심박수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으면서 운동하는 나에게도 다소 충격적이었다. (내가 운동하는 피트니스 센터에 그 차트가 걸려있어서 그런가?)
크게는 책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운동의 효과라는게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대단히 힘들다는 현실과 그것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피트니스 산업에 대한 폭로 -가 마음에 들었다. 엉터리 이론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면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폴 크루그먼 교수의 '경제학의 향연'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책을 읽고 나서 아쉬운 점이라면 올바른 운동법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는 것이다. 하긴 책의 내용이 운동의 효과라는게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는 말을 하고 있으면서 이것이 진짜 운동이다라고 말하는게 우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언제나 복잡모호하고, 사람들은 간단명료한 것을 좋아한다.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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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김영사 |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누가 말했다.
이런 류의 책들은 모든 증거들을 부인한다고.
증거들이 있긴 하다. 그것도 매우 많이.
문제는 증거들조차 믿으면 증거가 되고 믿지 않으면 증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증거가 있든 없든 차이가 없다.
신은 관념적인 존재다. 종교인들은 관념을 초월했다고 말하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비종교인에겐 상상력의 산물이다. 종교인들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저자는 이 말을 하려는 것 같다.
정작 중요한 것은 종교인들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한다는 것이다.
박해란 표현이 왜곡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믿지 않는자,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을 무지하고 구제해 주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이는 박해다. 나는 성경모임에 나오라며 집에가는 길에 무수한 방해를 받았다. 대화하기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음에도 그들은 끝내 나를 방해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구심점이 없는 비종교인들에 비해 다수기 때문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는다.
왜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그리 울부짖던 이들은 비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걸까. 직접적으로 전도하고 행인들에게 말걸지 않는 사람들, 나는 그렇게 극성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종교인도 마음 속으로는 비종교인을 가엾게 여기는 게 사실이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게 분명한 이들이니까.
하느님이란 사람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한다면, 왜 예수를 한명만 보냈단 말인가. 어째서 그동네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을 알게 하고, 조선인들은 구제하려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스스로 깨달을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 이역만리의 소식을 제깍제깍 전달해줄 통신수단이 있어서? 예수가 전도하러 곧 갈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모두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면 안된다. 예수를 특정 지방에만 보낸 것은 그들에게 좀더 빨리 하느님을 알게 해서 자기 곁에 데려오려는 편애니까.
그들은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나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못 믿는 것이다. 성경을 쓰려면 처음부터 전 세계 210개 국어로 써 주었어야 한다. 난 그네들의 말을 모르니까 지옥에 가야 하나? 번역이 틀리면 어떻게 하지? 잘못 알았으니까 지옥에 가야하나?
그렇지만 나는 신을 부정하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다. 다만 신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상대방에게 생각을 강요하거나 무시하거나 밀쳐내는 일 없이 모두 동등하게 사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곳에서 비종교의 자유를 소수란 이유로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이 비종교인들 사고의 구심점이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