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물은 일단 접어두고;
과제로 쓴 거긴 하지만 쓴김에 블로그에도 올린다.
'퇴고해서 제출해야지' 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퇴고란걸 해본적이 있던가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이라는 SF소설은 미래의 역사소설 형식을 띄고 있으면서 공화정과 제정을 비교하는 정치학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명작으로 꼽힌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라는 전능에 가까운 황제를 둔 ‘은하제국’과 ‘자유형성동맹’이라는 민주국가의 대결 구도를 그린 이 소설의 메인 테마는 ‘선의의 독재’와 ‘불완전한 민주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제국의 황제는 그야말로 신에 가까운 존재로, 전쟁에선 늘 승리하고, 귀족사회의 틀을 유지하면서 사회적인 불평등을 일소하여 제국을 완전에 가까운 통합으로 이끄는 인물이다. 반면 민주국가 측은 늘 반목하고, 통일되지 못한 국론을 분열하고 다수의 정치인들은 부패하고 무능하고 타락하여 국민들의 불만을 산다. 작가는 정치 구도를 독재와 민주, 통치자의 능력여부라는 두 가지를 기준으로 하여 유능한 민주정치, 무능한 민주정치, 유능한 독재정치, 무능한 독재정치로 나눈다. 유능한 민주정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가정하고,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은 무능한 민주정치와 유능한 독재정치라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독재정치의 미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열권에 달하는 책을 읽으면서 과연 인류에게 완전한 자유라는 것이 필요한가, 인류가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떤 종속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본 것은 노무현에 대한 비판을 적은 어떤 신문 사설이었다. 노무현에게는 어떤 개혁에 대한 의지도 없고, 단지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권력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혹자는 노무현을 보고 ‘개혁 팔아 권력 샀다’고 까지 말하기도 했고 나 역시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기에 포퓰리즘은 부정적인 의미로 기억되었고, 이 책을 접하는 순간에도 포퓰리스트는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을 말하는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포퓰리즘은 결코 간단한 현상이 아니’라고 하며 포퓰리즘을 일시적인 병리현상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구조가 가져올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위기라고 설명한다. 선거에 의해 정치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라면 언제든 대중 영합적인 인기정책과 카리스마적 언행을 보이는 포퓰리스트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퓰리즘 현상은 ‘은하영웅전설’에서 말하듯, 인류가 어느 정도의 강제를 원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포퓰리즘은, 정치학적 용어가 가지는 일반적인 성질과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용어다. 포퓰리즘 자체가 구체적인 실체를 갖고 있지 않고,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용어인 때문에 학자마다 다른 상황을 놓고 포퓰리즘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며 그 예로 드는 상황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일 수 있겠지만 마치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가져다 박정희가 당시의 우리나라를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정의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저자는 우선 포퓰리즘의 기본 성격을 ‘인민주권 회복론’과 ‘선동 정치인에 의한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로 규정하고 각각의 하위 개념을 추가로 지정하여 ‘기성 질서 안에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정치 지도자가, 인민의 주권 회복과 이를 위한 체제 개혁을 약속하며, 감성 자극적인 선동 전술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정치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이후 저자는 포퓰리즘의 예로 1870년대 러시아에서 진행된 '인민 속으로v narod' 운동을 꼽았다. ‘인민 속으로’ 운동은 일종의 농민 계몽운동으로 농민들의 계급의식을 일깨워 그들을 정치화하려 한 운동이었는데 소수 지식인 위주로 진행된 운동인데다 농민들의 호응도 부족하여 사실상 실패한 사례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미국 포퓰리즘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포퓰리즘의 개념도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며 ‘미국 정치의 가치와 전통 속에 깊숙이 들어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미국 정치를 말하는 데 있어 포퓰리즘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미국 포퓰리즘의 사례는 인민당, 롱 주지사, 월리스 주지사, 페로 대통령 후보에까지 다양하다. 다양한 사례들 가운데에서도 저자는 ‘미국 포퓰리즘은 개혁을 지향하지만 미국 정치의 근본 틀은 바꾸려 하지 않는’ 특성을 지적하며 이상주의적인 성격과 보수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라틴 아메리카는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곧장 연상될 만큼 포퓰리즘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많이 보이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의 정치인들이 많으며, 그들은 모두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전통 엘리트에 대한 도전으로 국제사회에서 이름을 많이 알린 정치인들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오랜 식민지 역사로 인해 사회 경제적 여건이 열악한 국가들이 많은 편이고 또 그만큼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통적 엘리트들에 대한 대중의 반발심이 클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대중의 불만사항을 포퓰리스트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만큼, 포퓰리즘이 성행하기 쉬운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보다 친숙하고 가까운 예로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고이즈미의 지지율은 취임 초기에 80%대에 이를 정도로 높았으며 집권 3년차에 접어들고도 50%의 지지율을 유지했었다. 이는 역대 일본 총리중 가장 높았던 것이다. 고이즈미는 자파 세력이 미약했던 만큼 대중의 지지에 많은 것을 기댔으며 일본 정치의 고질적 문제인 파벌정치 탈피를 선언하며 일본 국민에게 높은 지지를 얻었다. 그가 만들어낸 자민당 원로들과의 전면적인 대결 구도는 그에게 ‘반 기득권, 반재벌, 반엘리트주의’의 이미지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고 일본을 바꾸겠다는 그에게 많은 일본인들은 지지를 보냈다. 고이즈미 본인은 고통스러운 개혁을 추진했다며 포퓰리스트라고 불리길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고이즈미를 포퓰리스트의 사례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이러한 포퓰리즘들 가운데서 특성을 꼽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의 어원에서 보이듯 인민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포퓰리즘을 둘러싼 다양한 정의들을 보아도 인민이 포퓰리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정의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민은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억눌리고 잊힌 다수의 보통사람’으로 정의되었다. 포퓰리즘의 근간이 되는 이들은 지배 엘리트들에게 늘 억압당하고 무시당하는 처지로, 포퓰리스트들은 인민과 지배 엘리트와의 대립구조를 만들어낸 후 인민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 움직여야 하며, 보통사람들의 상식이 소수 지식인들의 지식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보통사람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소수 엘리트들에게 억눌리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스트들은 그런 기득권 체제에 대한 전면 개혁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대다수의 포퓰리스트들은 정치를 더럽고 타락한 것으로 간주하고, 스스로를 정치에 무관심한 것처럼, 정치인답지 않은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면서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정치세력, 엘리트주의의 온상인 의회정치를 좋아하지 않으며, 인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의제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인민과 직접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다수 인민이 직접 자신의 의지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포퓰리즘의 가운데에서 인민 대중은 정작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포퓰리스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인민을 주인공으로 모시는 것처럼 꾸미지만 정작 포퓰리즘 지도자들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해야 할 일을 알면서 직접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인민들에게 개혁을 위임받는다. 인민들은 ‘자기 이익에 대해 관심은 높지만 적극적인 참여 의지는 부족’하기 때문에 포퓰리스트들은 득세할 수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파레토의 이론에서 말하는 ‘비통치 엘리트’에 속하는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호시탐탐 통치 엘리트들을 누르고 일어서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런 비통치 엘리트가 갖는 신분 상승에의 열망은 대중을 동원하여 집권하는 방법을 택하게 만든다. 대중을 선동하여 집권하지만 그들은 집권 후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실제로 그 해결책을 실현하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으로부터 지속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장기간의 개혁책을 택하지 않고 순간순간의 인기정책으로 일관한다. 포퓰리스트들이 의사라고 한다면, 환자에게 몸에 좋지만 입에 쓴 약을 처방하기보다 그때 먹기 좋은 약을 처방하는 셈이다. 그들은 애당초 환자의 건강회복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포퓰리즘이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여기라고 할 수 있다. 인민의 주권회복을 모토로 집권한 포퓰리스트들이 실제론 인민들의 주권 회복보다는 개인의 영달, 스스로의 권력욕을 채우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민의 주권회복,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전능한 엘리트의 지배가 아닌,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실천하는 정치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그렇지만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사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며 따라서 대의제 민주정치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대의제 정치에서 대중을 우롱하려는 포퓰리스트들의 발호 역시 필연적인 현상이다. 서두에서 말했듯 포퓰리즘은 단순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구조가 가져올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위기다. 하지만 토크빌이 말했듯, 민주주의에 이런 구조적인 약점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전제 정치로 돌아갈 수 없다. 민주주의의 진행을 가로막으려 하는 것은 ‘신의 뜻 자체를 거스르는 것’일만큼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해결책으로 ‘인민의 깨어있는 의식’을 요구한다. 석유 비축 자금을 풀어 기름 값을 내리겠다는 포퓰리즘적 공약에 미국인들은 등을 돌렸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박수를 보낸 것이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포퓰리스트를 경계해야하며, 스스로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이 정당하지 못한 시대적 흐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흐름에 거부해야 한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의 최신작이다. 원제는 'The Conscience of a Liberal'. 사실 작년에 미국에서 나왔고 한글 번역판이 올해 나온 것이라서 최신작이라고 소개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제학의 향연'에서 경제학자로서 보수주의 경제학 이론의 허구성을 경제학적 논리로 지적했다면 이번에는 현재 미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득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경제학자의 영역을 넘어서 '지금보다 좀 더 평등한 사회가 바람직하다'라는 가치관을 드러내는 책을 써냈다.
크루그먼이 미국 현대사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평등하던 미국사회에서 어느 순간 보수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화당의 주류가 되어 그때까지 비교적 비슷했던 양당의 정치적 간극을 벌려놓았다. 그리고 공화당이 정권을 장악해서 경제적 불평등을 키웠다. 그리고 정권을 장악한 소수는 이런 체제하에서 계속해서 이득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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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그먼은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의 현대사를 크게 몇 가지 시기로 나누어 이야기를 진행시켜가고 있다.
1870년대부터 대공황을 지나 뉴딜정책이 시작되는 1930년대까지를 '길었던 도금시대'.
아무래도 미국의 국내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미국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있는 편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남북 전쟁 후 재건 시기를 지나 187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는 미국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시작한 시기로 극단적 소득 불평등이 나타난 '도금시대'(마크 트웨인이 붙였다고 한다)라고 불린다. 이후 1900년대부터는 이런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질서와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이 나타나는 '혁신주의 시대'라고 하는데 크루그먼은 소득불평등 정도를 봤을때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길었던 도금 시대'라고 명명했다.
1920~50년대의 '대압착'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뉴딜정책의 시작부터 1950년대까지를 부유층과 노동자 계급의 격차가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대압착'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은 크루그먼이 만든게 아니고 경제사가 클라우디아 골딘과 로버트 마고의 표현을 빌려왔다.
이후 1970년대까지를 노동자들의 황금기.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2차 대전이 끝나고 전세계가 빠르게 성장하던 장기 경제 호황시기다. 양 당간의 정책에 큰 차이가 없고 대체적으로 진보적 정책들이 시도, 유지되던 시기이지만 보주주의 운동이 서서히 시작되던 시기라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기 호황이 끝난 후 지금까지를 두 번째 도금 시대라고 구분하고 있다.
어느 정도 부침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의 혜택은 대부분 상위 몇 %에만 돌아가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시기이다.
이렇게 미국의 현대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크루그먼은 자신의 분석과 정치적 견해를 덧붙이고 있다. '일반 대중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시행하는 공화당이 어떻게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크루그먼은 '인종, 종교, 안보, 부정' 같은 요인을 들면서 보수주의자들의 교묘한 수법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아직도 인종차별이 먹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데는 대담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이런 수법에도 한계가 왔음을 지적하면서 아마도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하고 그들이 앞으로 가야할 전략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 전략의 첫 번째는 바로 전국민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은 충분히 실현가능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고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되는 개혁이며, 이를 바탕으로 정부가 신뢰를 얻는다면 사회보장제도와 누진세, 최저 임금제, 노조의 활성화 등을 추진하기 쉬워질 것이며 평등한 사회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거 이러한 시도가 실패했던 이유[각주:1]와 성공하기 위한 요소들을 짚어가며 설명하는 부분에는 그의 정치적 감각이 잘 나타나고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경제학자가 쓴 글이라기보다 정치학자가 쓴 글에 가깝다고 할까? 남부가 왜 공화당의 텃밭이 되었는지[각주:2] 공화당이 안보 정책에 있어서 더 유능하다는 편견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같은 내용은 경제학자들의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이다.
책띠에 '과거를 읽고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통찰하라'라는 문구가 씌여져 있다. 군대가기전 어느 교수가 학문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말해주었던 글귀였는데 책을 읽고나니 크루그먼은 이 말을 정말 잘 실현하고 있는 학자구나라는 생각과 정말 적절한 문구를 집어넣었구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특별부록으로 크루그먼이 이 책을 내고 미국의 권위있는 라디오 방송 NPR에 출연해 진행자와 나눴던 대화를 첨부한다. 물론 영어...
공화당은 현체제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의료보험 정책에 반대해왔으며, 클린턴 행정부는 다른 문제에 빠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고 분석한다. [본문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북부 공화당과 대립하여 전쟁까지 치뤘던 남부가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를 오가는 역사적 과정 [본문으로]
하루키는 스스로 일생일대의 작품을 썼다고 했다. 스스로 상당히 만족한 작품이라고 했는데, 과연 지금까지 하루키 문학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이후로 장편소설이 나오지 않고 있는걸 보면 여기서 그만두는 건가 하는 독자로서의 아쉬움도 있지만 권택영이라는 경희대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상실의 시대>, <태엽 감는 새> 에서 이어지는 라인업의 완성작이라고 할만 하기는 했다.
이런 저런 해설들이 많이 있고, 해설서가 따로 나올 정도기도 하지만, 몇가지 중요한 것만 (내 수준에서 느낄 수 있는 것만) 쓰자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도서관'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15살 소년' 정도다. 특히 도서관을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굳이 그 장소가 반드시 도서관이었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이었더라도 별 차이 없지 않았을까) 도서관을 비롯한 매 장면의 분위기 묘사는 가히 반할만 하다. 하루키 필살기쯤 되는건가;
일주일간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다. 버스에서만 읽기로 정해두고 읽었기 때문에 버스타는 시간을 하루에서 제일 기다릴 정도로 읽는동안 즐겁고 설레었는데 결국 다 읽고나니까 여기서 그만두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벨 문학상을 끝내 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세한 설정이나 분위기 묘사, 나카타의 상큼한 대사들은 멋졌지만 하루키에겐 그 모든 것이 어떤 고차원적인 상징, 입구의 돌이라거나 '흰 물체'같은 것들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팬들은 이런걸 좋아하니까 넣어야지'하고 넣는 걸수도)
상징성이 강한 탓도 있겠지만 여러가지로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얻기가 어려워 보였고(극우적이라고 늘 까이는 전쟁이야기가 어김없이 들어가는 데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일갈하는 부분까지) 다른 고전명작들에 비해 지나치게 통속적이기도 했다. 재미로 따지자면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지만 그 사이에 놓인 강한 상징이 문학가들과 독자들 사이를 가로막는 벽같이 느껴졌다.
사에키 상이 카프카의 어머니라는 건 알수 있도록 해 주지만 딱 잘라 말하지는 않고, 사쿠라와 관계하는 것도 실제가 아닌 환상속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태엽감는 새>에서 와타루 노보야가 아버지를 상징한다는 것이 솔직히 해설을 보기 전에 알 수 없는 사실이듯, 하루키류에 익숙하지 않다면 사실관계조차 머릿속에 명확히 그려지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나도 한번 보고 <태엽감는 새>를 보고 다시 두번째 봤을때 겨우 이해했다.) 이렇게 어려운데도 백만부나 팔리는 이유는 도통 모르겠다. <노르웨이의 숲>과 같은 리얼리즘 작품을 기대하는 심리 때문인가.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축구선수 데코 닮은 이 아저씨의 문학이 '통속소설'을 넘어 '시대를 초월한 명품'으로 인정받기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한국사회는 서구 여러나라들에 비해 민주주의를 숙성시킬 시간을 많이 갖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냉전반공주의의 헤게모니적 영향력이나
군부쿠데타에 의한 독재 및 그로인한 사회 전반에 만연한 군사식 문화, 권위주의...
그리고 보수와 극우만을 대표하게 된 정치구조.
그 일련의 폐단들을 '운동'으로 극복하고 형식적 민주화를 가져왔지만
87년 6월 혁명을 주도했던 운동 세력들은 그 자체로 정치세력화하지 못하고
민주화의 실현을 기존 정치세력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대표자들은 파레토의 엘리트 순환론의 실례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마냥
국민다수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한 채 자리뺏기 놀이에 머물렀고
그 와중에 너나할것 없이 보수화했다.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 유권자를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은 없다.
87년 6월 혁명이후 들어선 정권들을 보면
노태우 정권은 말할 것 없고...
김영삼 정권은 문민정부를 표방했지만 그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기존 보수세력과 야합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개혁논의를 꺼내기 힘든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김대중 정권은 최초로 등장한 야당정권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간의 정치세력이라는 것은
김대중과 그 추종자 집단에 불과한 것이었기에 이미 보수화해 있던 기존 관료세력,
그리고 의회에서의 자민련과의 연대를 통한 도움을 구하지 않고서는
정부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2002년에 쓰인 책이어서 뒤를 이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렇듯 민주화세력이 그 무능함을 보이는 와중에
CEO대통령론을 들고나온 이명박이 정권을 잡은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굴 뽑으나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한탄은 이제 한탄을 넘어선 타당성있는 현실분석이다.
실제로 '평민당-민주당-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이나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의 세력은 개혁/보수로 나뉘는 세력이 아니라 협애한 이념적 대표체계에서 한결같이 보수적' 이니까.
저자가 말하는 해결의 방법은 정당주의의 강화다. 보다 많은 갈등은 개개의 갈등이 가진 골을 줄인다고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더 많은 인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정당 스펙트럼이 구축되어야 민주주의는 건강해지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를 위해서 독일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선거와 같은 더 공정한 선거제도를 만드는 것은 선결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여러 면에서 놀랄 기회도 많았고 새겨둘만한 문장도 많았다.
비판이란 신제품의 런칭쇼를 하는 마케팅 사원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준비된 내용을 복기하듯 차근차근 설명해나가는 논지 역시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음에 읽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최장집 외 6명, 프레시안북 2008
(블라디미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가져온 제목인듯)
에 나오는 장하준 교수의 말을 인용해두며 다음 포스팅이 제발 빠른 시간내에 가능하길 바란다;
"처음 영국에 유학을 갔을 때 스웨덴 친구를 한 명 사귀었는데, 그 친구는 스웨덴의 좌파 정부와 우파 정부가 80%인 실업수당을 70%로 낮출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싸우는 걸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우파 정부라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좌-우의 판 자체가 다릅니다."
발자크는 문학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은 '흥미'라고 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봐지는 혹은 들어지는 영화에 비해 문학은 여러 사고작용을 필요로 한다. 책을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영화나 연극을 끝까지 보는 것에 비해 대단히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흥미를 끌지 못하는 문학이 소비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끝까지 읽히지 않는 문학은 심하게 말해서 가치가 없다.
나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들 때 가볍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든다. 버스에서 읽거나, 공부하기 싫을 때 언제든 꺼낸다. 날 어렵게 만들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라기엔 몇권 보지 않았지만)
그런면에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적잖이 껄끄러운 소설이었다. 매 장면장면마다 마약과 혼음의 환락세계가 펼쳐지고 주인공 류는 너무 구체적으로 떠올라서 읽기에 역겨울정도로 사진찍듯 상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덮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여러번 했지만 금방 읽겠다 싶어서 대강대강 넘기는 쪽을 택했는데, 뒷부분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이 나왔다.
릴리, 나 돌아갈까? 돌아가고 싶어. 어딘지 모르지만 돌아가고 싶어. 분명히 난 미아가 되어버린 거야. 좀 더 시원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옛날에 그곳에 있었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릴리도 알고있지?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는 큰 나무 아래 같은 곳.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여기가 어디야?
환각상태의 류는 이어지지 않는 막연한 문장들의 나열로 향수를 설명하고 있다.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 돌아가고 싶다. 여기가 어딘지 알수 없다. 그 시절이 어땠는지 기억하기보다 일단 지금을 벗어나고 싶다. 설명할 수 없지만 지금이 싫다고 류는 말하고 있다. 의미있는 문장일 듯 해서 서문을 다시 읽었다. 무라카미 류는 서문을 쓸때 중요한 부분을 친절하게 짚어주는 분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70년대 중반의 일본 현실을 설명하고 있다.
30년전 내가 아무런 자각을 포함시키지 않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상실감'이다. 1970년대 중반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그 대신에 무엇인가를 잃었다. 이뤄낸 것, 그것은 일본 고유의 문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근대화 달성이라는 대(大)목표였다. 하지만 일본 민족은 목표를 잃었다.
일본 독자적인 문화와 근대화의 충돌에서 벌어지는 시대인 1970년대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은 불안감의 상징과도 같다. 매일 수도 없이 다양한 마약들을 접하고 아무라도 상관없다는 듯 관계를 갖고 그러다 문득 다투고 헤어진다.
류는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혼자 정지한듯 멈춰 장면장면들을 사진찍듯 묘사하며 독자의 구토증세를 유발한다. 지금이 좋은지 이대로가 옳은지 뭘 잊고 있는지 류는 자꾸만 물어본다. 그리고 '검은 새', 내 도시를 파괴한 '검은 새'에 대한 반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릴리에게 새를 죽여달라고 한다. 방금전에 벌레를 눌러죽인 류는 검은 새를 두려워하며 도망가려고 한다. 작가는 검은 새 앞에 놓인 류를 통해 전후 일본을 말하고 있다.
처음 접했던 솔제니친의 글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짤막하게 실려있던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였다. 당시에 재밌을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입시준비에 찌들어서 책을 구해서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하다가 몇 년이 지난 후에 군대를 다녀와서 정말 감탄, 공감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뒤에 또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한 달 전쯤 NPR이라는 미국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우연히 솔제니친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듣고 검색해보다가 솔제니친의 대표작이라길래 읽게 된 책이다. 국내에는 88년에서야 전권이 번역되어 나왔고 가장 최신판은 95년 에 나왔다. 오래된 책이라 책값도 저렴(6000원)해서 바로 전권을 살까 생각했는데 절판된 책이라 구하기가 힘들었다. 출판사 홈페이지에 가보니 수요가 별로 없기 때문에 재출간 계획도 없다고 한다. 다행히도(?) 아직 학생이라 학교 도서관에서 쉽게 빌려서 읽어 볼 수 있었다. - 사실 아직 6권 중에서 1권 밖에 읽지 못했다.
1권에서는 주로 수용소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끌려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소화하긴 힘들었지만, 그 당시의 수용소라는 것은 죄수를 사회와 격리시킨다는 의미보다는 노동력의 확보를 위해서 세워진게 아닌가 한다. 의심많고 적도 많은 스탈린이라고 하지만 단지 정치적 권력장악만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수용소로 보낸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그토록 위대하다는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낸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면 그럴싸한 성과를 보여주어야했고, 그러자면 공짜로 부릴 수 있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죄가 있건 없건, 일단 잡아들인 후 고문으로 없는 죄도 만들어낸 다음 수용소에서 10년, 20년씩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이다. 잡혀들어오는 유형이나 과정, 당시의 법률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읽다보면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잘못된 부대운용으로 인해 포위되어 포로로 붙잡혔다 탈출해온 병사들까지도 적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모조리 다 수용소로 보낼 정도였던 것이다.
1권을 읽다보면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과정 - 친구와의 편지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다 체포되어 형이 확정 될 때까지 이곳저곳의 감옥을 옮겨다니던 이야기 - 을 아주 상세하게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이반데이소비치 - 수용소의 하루'처럼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지, 얼마나 작은 부분에까지 집착하게 되는지 잘보여주면서도 당시 소련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도 놓치지 않고 조망해주고 있다. 공산주의자였다는 솔제니친이지만 당시의 체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긴 어떤 사람이라도 그런 체제가 정상적이라고 옹호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런면에서 당시에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과연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그들의 지령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코카콜라 게이트, 윌리엄 레이몽, 이희정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Coca-Cola - La investigacion prohibida/ The Forbidden Investigation
원제에서 보이듯이 이 책은 금지된 조사를 하고 있다. 저자인 윌리엄 레이몽은 프랑스인으로, 코카콜라 매니아였다. 그는 코카콜라 관련 자료들을 모아나가다가 코카콜라사에 생긴 의문점을 파헤쳐나가게 된다. 저자는 책을 쓰기 위해 코카콜라사에 자료를 요청했다. 코카콜라의 대답은 책을 보여주지 않으면 자료를 줄 수 없다는 것. 다시말해 어떤 내용인지 검열되지 않은 책을 위한 자료는 없다는 뜻이었다. 코카콜라의 기적에 가까운 경영과 그 신비한 맛을 찬양하는 책이어야만 코카콜라사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받을 수 있다.
결국 저자는 스스로 자료를 구하여 코카콜라의 각종 비리를 파헤친다. 맨 처음 코카콜라를 만들어낸 약제사 팸버튼과의 계약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팸버튼으로부터 직접 제조법을 전수받은 디바 브라운과의 재판, 경쟁사인 펩시콜라를 누르기위해 동원한 갖가지 수단과 편법, 그리고 정권과의 유착, 2차 세계대전중에서도 독일군에 코카콜라를 팔기 위한 나치와의 관계등 저자 개인이 밝혀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비리들을 폭로한다. 달리 보자면 개인적인 조사로도 밝혀질만큼 많은 비리를 코카콜라가 숨기려고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코카콜라는 미국화의 상징이다. 코카콜라는 UN 가입국보다 많은 나라에서 팔리고 있으며 가장 미국적인 브랜드, 세계에서 가장 브랜드 가치가 뛰어난 브랜드. 미국인의 생필품이면서 물보다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음료이기도 하다. 전 세계를 지배한 그들의 경영성과는 경이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검은 콜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더 짙은 검은 비리가 있다. 코카콜라가 미국화(세계화)의 상징이란 것은 미국인이 말하는, 그리고 우리 정부가 말하는 세계화와 코카콜라의 경영철학이 상통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코카콜라가 세계시장을 장악하는 와중에 사라진 그 많은 음료회사들처럼 세계화는 그 자유무역의 깃발을 꽂으면서 그와 같은 수만큼의 다른 깃발들을 불태우고 있다.
그 코카콜라를 마신다는 것, 코카콜라의 경영철학과 세계시장을 지배한 경영자의 '유능함'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하나 세계화의 깃발을 환영하며 시장을 개방하고 무릎을 꿇어가고 있다.
리뷰라기엔 뭣한게 이미 방영이 끝난 드라마다. 그래도 볼 수있는 방법은 많으니까. TV로만 드라마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이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두가지다. 잊혀지는 사랑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사랑. 드라마에서 다루는 건 죄다 두번째 부류다. 잊을 수 없으니까 잊지 않는 쪽을 시청자들은 선호하지만 사실 사랑한다고 해서 꼭 결혼하는 건 아니고, 드라마라고 해서 모두 결혼으로 끝나는 건 재미가 없다. 시청자들의 압박으로 결론이 바뀌는 경우도 흔하곤 했지만 최근엔 제작을 끝내고 방영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꼭 그렇지도 않다. 나는 뭐 어쨌든 상관없지만 제작자 입장에선 자유도가 커진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간섭받지 않고 생각했던 작품을 완성도 있게 내놓을 수 있으니까.
두 주연배우(김태우♡김사랑) 의 연기가 역시 빛을 발한다. 아이비와 진구, 기타 일본배우들의 비중은 극단적으로 적다. 아이비 데뷔작이라고 소개하길래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비 는 극 중 비중에서나 출연시간에서나 일본 아역배우만도 못했다.
드라마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가보니까 4부작이란 점이 너무 짧아서 전개가 빠르다..는 의견들이 많이 있던데, 난 오히려 짧은 쪽이 짜임새있고 완성도도 높은 것 같아 좋았다. 일본 올로케이션이었으니까 제작비 문제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 와중에도 도쿄 곳곳을 영상미를 잘 살려내며 담아낸 것은 역시 감독의 재능이다.
중요한 것은 김사랑의 미모 사랑을 생각하는 두 사람의 감정 차이다. 현수와 수진은 정말 누가 더 좋아하는지 따질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인 커플이지만 그 사랑이 현실을 만났을 때의 대처에 대해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지 않겠다의 입장 차이는 극 중 여러차례에 걸쳐서 등장하는 딜레마다. 잊을 수 없으니까 잊지 않으려는 수진과 잊을 수 없지만 결국에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수의 차이는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온다.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 한번쯤 염두에 둬야 할 점이 아닐까.
물론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감정은 같기 때문에 현수는 수진보다 더 큰 아픔을 겪는다. 돌려보내는 쪽을 선택하면서 돌아가지 않으려는 연인이 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아플까. 그 간극을 넘나드는 연기가 빛을 발한다.
특히 수진을 잊기로 마음먹는 모습을 상징하는 눈물의 주먹밥 씬은 압권이다.
7년을 넘어 다시 만난 날, 밤을 새워 둘은 이야기를 하고 수진은 그동안의 기억을 자꾸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며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현수는 애써 피한다. 수진은 결국 그동안의 사랑을 잊었냐고 물으며 글썽이지만 현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과연 지난 여자는 돌아보지 않는 것이 남자의 사랑...인 것이 아니라 현수는 자신이 먼저 잊어야 수진이 자신을 잊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지난날의 지독했던 사랑에 대해 초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멋진 남자다. (만약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흔들리는 액션을 보여주는데 영화의 이해를 소홀히 들은 탓에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두 사람의 흔들리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은 한다. 그나저나 저 눈물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정말로.
사실은 이랬으면서..(헤어지고 1년 후, TV에 나온 수진의 모습을 보고 대화하고 있다; ...) 어떻게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드라마, 소설, 영화에서나 흔하게 표현되는 붙잡는 사랑의 힘도 대단하지만 현수가 보여주는 보내는 사랑의 힘도 그에 못지 않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