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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30 욕심 (2)
- 2009/04/09 신변잡기 (2)
- 2009/03/28 쳇바퀴 (1)
- 2009/03/14 질투는 나의 힘
- 2009/03/05 New skin & New Blogging (2)
- 2009/03/04 시간유감
- 2008/10/27 진보비판 note #1 (2)
- 2008/10/23 대성당과 비정규직
- 2008/09/13 좋은 비평
200,000 hit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은 이것저것 꼽을 수 있을만큼 적은 수가 아니지만
최근 느끼는 것은 성실함이 정말 갖추기 어려운 덕목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대부분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1,2년 반짝하거나 한두달 정도만에 훌륭한 일을 해내는 사람도 있지만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도 하거니와, 그 반짝하는 결과를 만드는 것도
어쩌다 우연한 과정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반짝임을 위해 오랜시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그 성실함은 빛을보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간혹 망각한다는 것이다.
나도 간혹.
사실 나에게 필요한 성실함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루에 열시간 남짓을 책상에 앉아서 공부 외의 딴짓을 하지 않고 1~2년 정도를 버티면 되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김영덕 선생이 생각난다
처음 강의하던 날 친구하나, 동료 선생과 학원직원, 세명이 강의를 들었다던 그는
아무도 자기의 강의를 찾지 않아 수강생이 세명이 되는 날까지 강의하고 싶다고 했다.
'쿨하다, 멋지다' 소리를 듣는 것보다 그동안 자기를 믿고 자기가 가르친 방법대로
공부해온 수험생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면서.
사실 스포츠스타도 연예인도 아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성실하게 자기의 시간을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다.
/
사실 200,000 hit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불성실한 포스팅으로 200,000 hit에 미미한 공헌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 좀 부끄럽다.
여긴 왜이렇게 방문자가 많은걸까?
'사람'은 별로 안오는게 확실한데...
난 스스로 욕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난 내가 갖기에 과분한 것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욕심이란, 스스로 그것을 갖기에 충분한 사람이 아님에도 그것을 가지려하는 일이다.
갖고 싶은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려들기보다 그것을 가질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 먹지도 못할 과자를 들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것이나
굳이 다 쓰지도 않을 돈을 안고 무덤까지가는 것이나
필요하지도 않은 차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에겐 과분한 이성을 만나려고 생각하는 일
시험에 합격하길 바라면서 게으르게 공부하는 것
멋진 몸매를 원하면서 운동을 게을리하는 것
먹물튀기고 싶으면서 책을 읽지 않는 것
갖고 싶은 마음은 좋은 것이고 어떤 이들에겐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무작정 가지려는 마음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갖기위해 내가 갖춰야할 나의 모습을 만드는 것.
차를 끌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경제력을 갖춰야 할 것이고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면 무작정 합격을 바라기에 앞서 부지런한 나를 만들어야 할 것이며
좋은 옷을 입고 싶다면 그 옷이 어울릴만한 직업을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다.
원하던 것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원하던 것을 가지는 기쁨보다
원하던 것에 어울리게 된 자신을 바라보는 기쁨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했다.
학교엔 벚꽃이 만개했고 난 다시 턱걸이를 시작했다.
턱걸이다. 턱걸이... pull up.
운동하지 않는것이 싫어서 최소한의 운동을 하는 셈치고 매일 아침 등교길에 하고 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나마 하고나면 약간의 안도감이 든다.
티스토리 블로그를 만들때 이름을 pullup이라고 지은 건
당시에 내가 턱걸이 만능론에 심취해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pullup은 거꾸로 해도 pullup이란걸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dcinside에서 나유나 기자의 기사에 늘 달리는
'내이름은 나유나 거꾸로해도 나유나' 를 보고 떠올린 건 절대 아니다;;
북한은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며 미사일을 쐈고
자살한 장씨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여전히 오가고 있다.
2009시즌 프로야구가 개막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인척 비리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주가는 1300을 오락가락하고 있으며
환율은 작년 말에 비해 많이 내렸다.
내일은 장하준교수가 학교에서 강연을 한다.
우리세대에게 사상은 취향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내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인데다
그냥 그 존재 자체가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보러갈 생각을 하고 있다.
그와중에 난 중급회계와 세법개론을 보고있다.
누가 합격을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었을때
난 합격을 확신하지는 않지만
합격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뭐 그게 그거다.
합격한다고 생각하는거나 합격하지 않는것을 생각하지 않는거나.
...pullup은 거꾸로 해도 pullup이다.
공부한다고 하면서 생색낸건 이미 하루이틀일이 아니게 되었지마는
정작 내 생각에 '본격적으로' 하게 된 지는 며칠 되지 않은 듯 하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라는 것은
매일 8시부터 9시까지 (한시간이 아니라 열세시간)을 도서관 언저리에서 보내게 된
한달 전부터가 되겠다.
그래도 나름 주5일제를 지키려고 노력중인데, 그 휴일이 어떨 때는 수요일이기도 하고, 일요일이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 쉬는 날에도 아침 8시까지는 학교에 온다.
원래 우리 스터디(출첵만 하고 공부는 알아서 하는 거라서 생활스터디 혹은 밥터디라고한다)
출석시간은 아침8시지만 난 출근버스에 앉을 자리가 있는
6시 50분에서 7시 사이에 버스를 타려고 여섯시에 일어난다.
도서관 좌석을 발급받으면 7시 30분에서 7시45분 사이쯤 된다.
3층 노트북 열람실에서 한시간 정도
어제 공부했던 걸 다시 훑어보거나 계획을 점검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하다가
좌석발급을 하지 않아도 되는 4층으로 옮긴다. 9시부터 개방되기 때문에 올라오면 아무도 없다.
그리고는 점심 먹기 전까지 동영상 강의 두개정도를 듣고자 하는데
세법의 경우는 강의 한개가 길기도 하고 잘 이해가 안되서 자꾸 돌려듣다가 강의 한개 들으면 열한시쯤 된다.
중급회계의 경우는 이래저래 여러번 했기 때문에 두개정도를 1.4배속정도로 들을 수 있다.
난 아침을 여섯시 반쯤에 먹기 때문에 열시반이 되면 위가 오글오글거려서
점심시간인 열한시까지 무척 괴롭다.
규칙적인 생활 탓인지 난 식후 네시간이 되는 열시반에 매일 그 고통을 느껴야한다.
스터디 멤버인 재상이는 아침을 안먹는데도 그 고통을 느끼고 재호도 같은 시간에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점심시간을 열시 반으로 당기면 점심식사 후부터 저녁시간인 여섯시까지 버티기가
더욱더 괴로울 것이라는 판단 하에 점심시간을 옮기지 않고 있다.
점심은 늘 공학원 평화의 집에서 먹는다.
지난 월요일부터 순두부찌개의 가격이 300원 인상되어 죠금 슬프다.
식사라기보다는 영양섭취에 가까운 행위를 마치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양치질을 하고.
오후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조는 시간이 중간중간 섞여서 30분~ 1시간 정도 되는 탓도 있고
가끔 우리 공부하는 걸 구경하러 광영이가 오기도 했다가 원형이가 오기도 했다가...
재호는 수업도 들으러 가고.
그리고 여섯시에 저녁을 먹는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괜찮은데 수요일이나 목요일 이시간이 되면
재상이는 알콜금단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본인은 잘 모르지만 나랑 재호는 이 인간이 술고프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그래서 저녁시간에 나는 오늘 저녁이 제발 무사히 끝나기를 마음 한구석에서 기도하는데
어쩌다가 재호마저 발동이 걸리면 그날은 무사히 넘기기가 좀 힘들다...
사람은 쳇바퀴를 계속 굴릴수록 회의를 느낀다거나
심적으로 힘들다거나라는 걸 느끼는 것이 정상이라는데 난 왠지 아무렇지 않다.
되려 난 단순하게 여섯시에 눈이 떠질 때마다 늦잠자지 않았다는 것이 기쁘고
긴장하다가 깊게 잠들지 못해서 세시나 네시쯤 잠이 깨면 기분나쁘기는 커녕
아직 여섯시가 아니라는 게 너무 좋다.
매일 다른 스케줄 때문에 들쑥날쑥하게 점심을 먹고, 매일 다른 시간에 잠에서 깨고
매일 다른 사람과 점심을 먹고 매일 다른 사람과 저녁을 먹고 매일 다른 공부를 하는 것보다
쳇바퀴 도는게 훨씬 좋다.
이라는 시를 읽었다.
어이없게도 김영덕이란 학원강사가 쓴 <IFRS중급회계>에는 매 chapter의 끝에 시가 적혀있다.
나는 문학도도 아니고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에세이스트가 아니며 문학소년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흰 종이와 검은 글씨 몇개의 조합이 사람의 마음에
잔잔한 혹은 격한 파문을 일으킨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을 극히 존경한다. 언젠가 나도 그리 되었으면.
그래서 나는 도서관을 뛰쳐나가 시집을 샀다.
기형도의 말이 적혀있었고 나는 약간의 파문을 느꼈다.
내가 시를 읽는다니 말도 안된다.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 기형도
New skin & New Blogging
나름 봄스러은 새 스킨을 적용했다.
이건 뭐 티스토리 스킨이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어서
티스토리 유저 중에 같은 스킨을 쓰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텍스트큐브에서 옮겨온 이상 어쩌겠나 그냥 써야지.
1. 광고는 빼기로 했다.
100$를 다 채워야한다는 욕심에 계속 달아두었었는데
요즘 구글애드센스를 보면 수익광고보다 구굴의 공익광고가 떠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아
더이상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퍼블릭 블로깅의 목적은 사실 거기에 있었는데 ( ;;; )
도서(특히 인문학), 시사(특히 정치) 관련 포스팅은
돌이켜보니 퍼블릭 블로깅에서 택할수 있는 가장 인기없는 주제였던 것 같다.
2. 사이드바 달력을 달아놨다.
스킨에서 기본제공되는 달력이지만 한달에 한번을 잘 안쓰는 블로거에게
달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서 늘 없애버렸었는데;;
앞으로 좀 잦은 빈도로 포스팅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으로
달력을 없애지 않고 달아놨다.
3. 컨셉변화
그동안, 그러니까 2007년 10월부터 지금까지 했던 포스팅들은 무미건조 텍스트포스팅의 극치로,
사진한장 없는 포스팅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해(....)
앞으로는 내 블로그에서 (무려) 동영상도 볼 수 있게 될 것.
따라서 가끔 무의미(혹은 무성의)한 포스팅도 가끔 볼 수 있게 되겠지만,
그래도 텍스트에 질식할 것 같아(가끔 나도 그런다) 블로그를 탈출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한다...
내가 가는 도서관은 네시간 단위로 좌석연장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네시간은 너무 금방 가버리기 때문에 연장시간을 놓치기 일쑤다.
나는 대체로 네시간 단위, 혹은 그보다 좀 더 큰 단위로 살고 있는 모양이다.
어릴 적엔 '시간'이라는 단위는 그 이름만으로 어마어마하게 느껴지곤 했는데,
시간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던 것일수도 있겠지만
학교 수업시간이 한시간이 채 안되는 때문이 더 큰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학생은 너무도 시간을 큰 단위로 나누어서 사는 부류인듯 한데,
대체로 시간을 크게 쪼개는 부류는 한량스러운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대학생은 대단히 한량스런 직업이라는 것이 간절하게 느껴진다.
내 기억을 돌이켜 보면 쪼개는 단위가 한시간 이내였던 시절은
고등학교때까지의 12년정도와 군복무시절이었던 것 같다.
(학교다닐 적의 방학기간이라거나 상병 3개월차 이후의 군생활을 제하고)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나름대로) 부지런했던 시절과
한시간 이내의 단위로 생활을 했던 시절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본다.
인간의 집중력이라는 것은 한시간 내외라고들 한다.
말인즉 두시간 단위로 산다라고 하면 두시간중 한시간만을 집중해서 사용하고
나머지 한시간은 언제 가는지도 모르게 보낸다는 것인데,
만약 그 한시간 이내의 단위로 산다면 매 한시간마다 새로 집중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낭비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진보비판 note #1
난 사상적으론 양비론적이고 실제적 성격은 양시론적이지만
양면 모두 교수에게나 한국사회에서 환영받는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다들 분명한 자기 입장이 있어야 한다고들 하고 애매한 입장은 기회주의정도로 배격하려고 한다. 긍정할 점은 서로 긍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입장은 기회주의로 배격당한다. J.M.케인즈도 '나는 입장을 바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연재물이 될 각오를 하고 일단 써본다.
ㅡㅡㅡㅡㅡ
우리 사회에서 진보비판=수구라거나 보수비판=진보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있지만 양극화논리에 농락당하는건 지겹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 사회의 지배적 논리는 보수/진보구도인데
대개 보수/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기준은 특별히 없고,
여러 쟁점에서 나와 반대편에 선 사람/단체를
보수 혹은 진보로 규정하는 방식을 쓴다.
노무현이 진보적이라고 규정당한것이 그 대표적 사례인데
노무현은 보수언론 비판 등 각종 막말들을 제외하면
한미FTA라거나 국보법, 이라크 파병 등의 쟁점에서 한나라당과
별 차이없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진보세력에게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한것은 물론
할거 다하고도 보수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머물렀다.
대통령이면서도 아웃사이더.
강준만은 <아웃사이더 컴플렉스>에서 그런 노무현을
코리안드림과 권력욕의 화신으로 정의했는데
난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것보다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시키는 것, 자신을 아웃사이더이게 했던
한국사회에 복수하는 것이었다는 말인데
김재호(지금 정입선생님)도 고졸 노무현이 법조계에서 받은 차별과
모멸감을 대통령이 된 이후에 숨기지 않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적절한 분석까지는 못되겠지만 어느 정도 사례로는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이런 노무현을 비판하는 것은 앞으로 한국사회에 있어
이명박에게 '약속했던 코스피3000은 어디갔느냐?' '747공약이 코스피지수였냐'고 묻는 것보다
몇배는 더 생산적이며
'그래도 노무현이 개중 나았다'는 논리로 노무현을 감싸는 것은
'그럼 이명박보다 허경영, 정동영 등이 나았느냐'는 논리로 반박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하지 못하다.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했다'는 논리도 마찬가지로
'그럼 이명박에겐 왜 힘을 실어주지 않냐'고 반박될 때 그 타당성을 상실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노무현은 까여 마땅하며,
임기가 끝났으니 더욱 까여야 할 것이며,
이명박 정권이 '이러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까여야 할 것이다.
투비컨티뉴드..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로버트? 지금 뭐 하시는 거에요? 무슨 일이에요?" 아내가 말했다. "괜찮아."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 맹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았다.
"감았나?" 그가 말했다. "속여선 안 돼."
"감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계속하게나." 그가 말했다. "멈추지 마. 그려."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딱 붙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다 그린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계속 그렇게 있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말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_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Cathedral) 이라는 단편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맹인 로버트는 아내의 친구인데, 내가 아내와 결혼하기 이전부터 친하던 사이다.
나는 그가 달갑지 않았지만 아내의 친구였기 때문에 그의 방문을 모른척 할 수 없었고
생전 처음 만나는 맹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식사 후 아내가 잠든 사이에 TV를 보던 나는 맹인에게
TV에 나오고 있는 대성당의 모습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맹인은 설명을 듣다가 대성당의 모습을 함께 그려볼 것을 제안한다.
둘은 손을 잡고 대성당을 그리기 시작하고
나와 맹인은 눈을 감은 채 대성당 그림을 완성한다.
말로는 누구나 쉽게 내뱉고 쉽게 잊어버리는 연대, 공유, 배려같은
싸구려 감정이 아니라, 완전히 단절된 두 사람을 하나로 잇는
나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작업을
카버는 단 삼십페이지짜리 단편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_학교 곳곳에는 비정규직 경비분들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 서명운동, 자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오늘 정말정말정말 우연찮게 아저씨와 함께 청소를 하고 같이 이야기도 하며
다음에 핸드폰에 mp3넣는거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어쩌면 값싼 우월감이겠지만 전 연대생들에게 연대를 호소하는 '그들' 중 몇명이나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나 하고 다닐까하고 궁금해졌다.
<대성당>을 열번도 더 읽었지만 오늘 본 <대성당>은 좀 길게 느껴졌다.
최근 달았던 몇몇 리플들에 대한 반응을 보며 내 '딴죽의 체계'를 설명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분야에 대해 코멘트를 달아도 '까칠하다'는 반응을 듣는 나를 스스로 변호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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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critics 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관심을 전제한다. '한 대상에게 가해질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 비평은 일종의 관심표현이며, 관심대상에 대한 격려이자 다독거림이다. 같은 맥락에서 비평대상의 각성이나 발전을 유도하지 않는, 흠집내기가 주가 되는 비평은 좋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정치비평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대통령의 어떤 정책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라는 최소한의 형식도 없는 무차별한 '까대기'가 웹상에서 난무한다. 쥐를 닮았기 때문에 싫다, 마릴린 맨슨같다식은 예의를 갖춘 편에 속하는데, 그러면서도 대다수는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해야한다는 최소한의 내면기준도 갖추지 않고 있다. 단순히 이건 싫다. 저건 나쁜 정책이다 등의 지적만 늘어놓을 뿐이다. 정작 자세히 물으려 하면 '정치는 관심없어'로 일관하기 일쑤다. 좋은 정치 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비평자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정치상 혹은 정치인상을 그려줄 수 있어야 한다. 난 그것이 어렵고 또 두려워서 사회비평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으며 살고 싶어서 이명박님을 좋아하려고 노력중인데 눈코입이 없으면 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좋은 비평'을 하지 않는 개인은 좋은 비평의 어려운 몫을 또 다른 정치인에게 돌리고, '말은 잘한다'따위로 이죽거린다. 남의 약점찾기 바쁜 그들은 '개인은 약하다'는 생각을 하며 투표하지 않고, '소시민은 무력하다'며 많은 사회악을 모르는 척 하며, 그가 처했더라면 그와 똑같이 행동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의롭지 못했던 다른 개인을 거리낌 없이 공격한다. '본인의 사정'은 지상 최고의 면죄부가 되고, '타인의 사정'의 사정은 물어볼 것 없이 최악의 변명거리가 된다.
공직자윤리를 말하던 어떤 글을 보고 한심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직업윤리가 필요한 것은 비단 공직자뿐만이 아닌 현실에서 유독 공직자에 대해서만 직업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법으로도 규제받지 않는 수많은 빅 브라더들과 신의 아들들이 숨쉬는 사회에서 소시민에 가까운 공무원을, 그것도 그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비윤리적이다라는 이유로 비난할 수 있을까? 그분은 결국 신문칼럼 쓴답시고 잘난척한 것에 불과하다. 아니면 대한민국을 법이 아닌 윤리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거나.
그 반면 엉터리 칼럼을 연재한 신문담당자나 칼럼니스트를 이해하자면 이해할수 없는 일도 아니다. 칼럼니스트도 분명 다른 주된 직업이 있을 테고, 매주 쓰는 글에게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담당자 역시 촉박한 시간여유를 가지고 원고를 교정하고 칼럼니스트와 원고의 조정을 하고 결제까지 받아야 할 테니 그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내가 어쩌다 읽은 글이 어설펐다고 난리치는 걸 얘는 또 왜이럴까 하며 골치아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에 '내가 염세적이라면, 염세적이지 않은 어른들은 바보야'라는 말이 나온다. 분명 사회는 나를 염세적이지 않을 수 없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애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한 가르쳐준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굳이 이해하자면 못할것도 없기도 하다. 내 이해가 상대에겐 오해가 되기도 하겠지만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빛바래는 일은 또 드물다.



